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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이란? 4.19혁명의 배경과 전개과정? 잊지말자.

by jan1 202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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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이 무엇인가? 정확한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서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4.19 혁명 기념일을 맞이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자 지식백과 및 다양한 매체를 확인한 후 포스팅하였다. 잊지 말자. 

 

4.19 혁명이란?

남한과 북한이 6.25 전쟁중일 때,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헌법의 내용을 고쳐가면서 본인이 대통령이 된 1948년부터 1960년, 약 12년 동안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독재 정치 (사람, 집단이 전체 권력을 마음대로 지배함)를 진행했다. 이에 대한 연장선으로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본인은 대통령, 같은 당에 소속된 인물을 부통령으로 임명하기 위해 투표함을 바꿔치기하여 본인과 부통령 채택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자신들에게 투표하도록 강요하는 부정선거 (올바르지 못한 수단, 방법의 선거)를 진행했다. 이러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지역별로 진행되었고, 시위 도중 최루탄 (눈, 코 등을 자극하여 눈물과 콧물을 흘리게하는 물질을 넣은 탄알)에 맞아 생명을 잃은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어 이를 계기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에서 부정선거 타파, 재선거 진행, 이승만 정원의 퇴진을 외치며 시위가 진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학생들과 시민들의 희생이 있었으며, 이로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4.19 혁명 배경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50년,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3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수많은 전쟁고아들과 자생력을 잃은 경제, 해외 원조에 의존해야만 했던 이 나라의 재건하고 국가경제를 일으켜야 할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등으로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시행했다. 이에 정권에 실망한 국민들이 1956년 민위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자,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에 예정되었던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하였다. 

 

4.19 혁명 전개과정

 

- 대구 2.28 민주운동 :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부통령 후보의 대구 유세가 2월 28일 수성천변에서 예정되었고 이를 막고자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시험,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을 대구지역 중고등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강제했고,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 대전 3.8민주의거 : 1960년 3월 8일~10일 대전고등학교,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민주 저항운동 전개. 

 

- 3.15 부정선거 : 이승만 정권은 12년간 계속되었던 장기집권을 연장하고자 선거조작을 계획했다. 야당 후보인 조병옥이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이승만의 4선이 확실시되자,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켜 권력을 물려줄 계획으로 공무원들을 동원시켜 부정선거를 실행했다.  ① 4할 (40%) 사전투표 및 투표함 바꿔치기 ② 유권자 명부 조작 및 대리투표 ③ 득표수 조작 및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④ 야당 참관인 축출 ⑤ 자유당 완장부대와 깡패 동원 유권자 위협 --> 개표과정 중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표가 100% 가까이 나오자 내무부 장관이 득표수 줄여서 발표. 부정 선거 결과, 대통령 이승만 963만 표 (85%), 부통령 이기붕 833만 표 (73%)로 당선됨.

 

- 마산 3.15 의거 (마산 1차 시위) : 마산시민과 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부정선거를 폭로하고 선거무효를 외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를 강제해산시켜려는 경찰의 발포로 사망 7명, 중상 1명, 실종 1명의 희생자와 250여 명의 부상자 발생

 

- 4.11 (마산 2차 시위) : 시위 중 실종된 16세 김주열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격분한 시민들은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2차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이 쏜 총탄에 1명이 사망하고 수십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이승만 독재정권은 4월 26일 무너졌다.

 

- 4.18 고대의거 및 습격 : 1960년 4월 18일 3,000여 명의 고려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기성대세를 반성하라"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각 처단하라"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민주역적 몰라내자, 자유·정의·진리 드높이자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국회 앞 평화시위 진행하였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정치깡패 '반공청년단'이 흉기를 휘두르며 습격했으며, 다음날 신문에 이 같은 사실이 보도되자 분노한 시민들과 중·고·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었나 왔고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면서 4.19 혁명이 시작되었다.

 

- 4.19 혁명 (피의 화요일) : 시위대는 10만 명이 넘었고,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했으며, 경찰들이 이에 집단 발포하여 21명의 희생자와 172명의 부상자가 속출되었다. 이승만 정부의 강경대응에도 인천, 수원, 부산, 광주 등 전국으로 확대되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날 전국적으로 시위대와 경찰등 115명이 사망하고 727명의 부상자가 발생되었다. 유혈사고 책임을 지고 국무위원과 부통령이 사표,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직만 사퇴하겠다며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 4.25 교수단 시위 : 이승만 정권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들이 다시 분노하였다. 이에 전국 27개 대학교수단 258명이 종로에서 시위를 벌이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였다. "학생시위는 정의감과 민족정기의 발로이며 대통령, 국회의원, 대법관 등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라고 요구. 교수단 시위에 힘을 받은 시민들과 학생들의 시위는 밤새 계속되었으나, 경찰과 계엄군들은 시위대를 저지하지 않았다.

 

-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승리의 화요일) : 시위대는 4월 25일부터 이승만 정권의 퇴진과 대통령 하야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렸다.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은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다. 국회는 대통령의 즉각 하야, 정·부통령 재선거, 내각 책임제 개헌 등을 결의했다. 

 

 

 

출처 : 국가보훈처 (국립 4.19 묘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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